노골리즘 선언

NOTICE 2008/05/26 21:09
_연상호의 노골리즘 선언

통속적인 감정들과 통속적인 연출 방식으로 통속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수 있을꺼 같다.

그러니까..

예술이라고 하는 건 항상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과정에서 은유라든가 비유 상징등을 쓰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잘못 읽혀지거나 그 은유나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본질을 볼 기회조차 잃는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을 추구하는 방식에 어떤 기교나 절제된 감정을 이용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 노골적으로 달려가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다짐이다.

이건 문화마저도 권력과 계급의 어떤 부류만 이해할수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서 우리 어머니부터 고루한 학자들까지 작품을 접한 후 같은 것이 이해되길 바라는 바램이다.

최규석과 같이 만든 단어인데 규석이가 먼저 선언을 했길래..ㅎㅎㅎ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것이냐 하는 것이 남아있는데..

사랑은 단백질은 노골리즘에서 많이 벗어난 작품이고 ㅎㅎ 아마 다음 작품 쯤에는 노골리즘의 실험을 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대표적인 노골리즘 성인으로

RATM 과 마를린 맨슨이 있겠다. ㅎㅎ



_최규석의 노골리즘 선언


한국의 대중적 서사장르가 사회를 다루는 방식은 겉핥기식이다.

나도 그랬다.

공룡둘리'를 읽고 나면 "세상은 됻같애"라는 생각이 들고 '습지생태보고서'를 읽고 나면 "샹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원한 건 그런 반응만은 아닌데 독자들의 생각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그 이상 진행하는 독자들은 사실 이거 안 봐도 상관 없는 사람들이다. (작가라는 작자들은 그딴식으로 싸질러 놓고는 대중과의 괴리때문에 괴로워하며 고독을 씹어돌린다. 혹은 "의미는 있는 작업이었다고 봅니다. 그래도 유럽에선 알아줍니다"따위의 같잖은 소리를 나불거린다. 웩!)

작가들이 형식적으로 너무 점잖을 빼서 그렇거나, 사회의 구석구석을 명확하게 보지 못해서 그렇다. 혹은 겉멋만 든 거다.

사회가 됻같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됻같고 왜 됻같은지 누구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어떻게 해야 덜 됻같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형식이야 신파든 멜로든 액션이든 상관 없다. 재밌게 보고 세상의 어떤 구석을 명확히 볼 수 있는 시선 하나를 얻으면 된다. 이런 것의 예를 들자면 '헬로우 미스터 블랙잭', '사채꾼 우시지마', '쩐의 전쟁',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들 수 있겠다. 공룡둘리나 괴물에서처럼 '뭔지 명확히 모르지만 세상은 참 한심한 거 같어. 그리고 이런 작품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내가 참 자랑스러운 거 같애'라는 반응수준에 만족하는 것은 나태다. (뭐... 나태가 범죄는 아니니까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미학적 성취만을 목표로 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작가라면 한시적으로라도 자신의 고고한 취향을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는 창작활동을 나는 "노골리즘"이라 부르기로 한다. (연상호랑 같이 만든 단어인데 연상호가 생각하는 노골리즘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아직 잘 몰라서 일단은 내 생각만 적었다. 그리고 나의 노골리즘 만화는 아직 발표된 바 없다.)


허지웅의 노골리즘 선언.

노골파 최규석에게 핀잔을 듣고 조금 늦게 쓰는 노골리즘 선언.

절반을 넘긴 2008년은 내게 있어 9.11과 같았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연달아 터졌다. 예상할 수 없었다는 건 감당하기 힘들다는 말과도 같다. 대부분 신뢰에 관한 일이었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 그와 관련된 세계 하나씩이 철저하게 파괴돼 무너졌다.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그 몇 개월 동안 죽으려고 두 번 해봤고 남이 내 앞에서 죽으려는 걸 한 번 이상 봤으며 이 모든 걸 이겨내려면 잔인해져야 한다며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을 세 번 이상 연기해봤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람이 제 앞에 닥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기연민과 증오로 얼룩진 피해망상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역설적으로 빠지기 가장 쉬운 것이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나누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바로 그 추억이란 무섭게 감정적이고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며 태연스레 지구의 원리를 내려다보는 가장된 원숙함이다. 요컨대 도사가 되는 것이다. 부조리까지 기꺼이 안아 감쌀 만큼 비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어른스럽다’고 일컫는 태도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테다. 세 번째는 철저한 객관화의 태도다. 당신의 삶과 세계의 풍경, 더불어 그 자신마저 철저히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도사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도사는 모든 걸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되레 주관적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내 전부였던 그녀와 헤어졌어. 도사는 잘난 척 한다. 세상이 사람이 사랑이 원래 그래. 정직하게 객관화된 자는 그 처음과 끝의 아름다움과 더러움까지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더불어 반성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는 어렵다. 세계의 균질하지 않은 풍경 앞에 지나치게 처연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오만한 순간, 덜컥 도사의 길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운데 첫 번째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고선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 번째 방식을 알고 받아들여 노력하면서 내 삶은 조금 나아졌다.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이 늘 되풀이되는 실수나 감정의 과잉을 거듭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뿌옇게 뭉뚱그려진 수사적 표현으로 나와 너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매우 적확하게 객관화된 구체적 언어들로 설명하고 끝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조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빤한 잘못 그 자체로 인식하고 분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하자. 고민해야 한다. 조금 더 고민해야 한다. 늘 솔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결국에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나의 노골리즘이다. 노골리즘은 건강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