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보았다. 잡지에 연재될 때 몇 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보니 본 게 거의 없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만화가 후배의 소개로 대학 졸업작품집에 실린 최규석의 작품을 본 이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등 그의 주요한 작품들을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적은 없었다. 두어 시간 그렇게 빠져서 책을 다 보고나서야 난 그 두어 시간 동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 이게 다 지 이야기지.’ 그 이야기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이의 체험임을 되새기며 난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삼십년 전이었다면, 말하자면 한국의 인텔리들(이를테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민중이 각별한 의미를 갖던 시절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졌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은 ‘민중의 자식이 그린 가슴 아픈 성장기’라 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더 이상 민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시민이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그렇게 된 사연과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사실은 민중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이라는 것. 그리고 민중은 인텔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투신’하던 시절이나 자신들을 ‘배신’하고 시민을 말하는 지금이나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인텔리들의 민중과의 관계는 실재했던 게 아니라 단지 인텔리들끼리의 가상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들에게 민중은 그들이 오래 전 외치던 대로 ‘역사의 주인공, 생산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부인할 순 없지만 애써 외면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변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른바 진보적인 성향의 인텔리들이 즐겨 읽는 잡지에 연재되고 역시 진보적인 인텔리들을 주요한 독자로 하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사실 이런 질문은 매우 싱거운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한 민중의 자식의 가슴 아픈 성장기’를 이젠 제 세계관이나 사회적 실천에 결코 연결시키지 않은 채 잠시 구경하려는 인텔리들에 대한 야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그 야유가 작가 자신에게까지 뻗어있다는 점이다. 최규석은 이젠 모든 면에서 ‘원주민이 되어버린 민중’에서 떨어져 나와, 단 한 번도 입신양명을 꿈꾼 바 없으나 어느 새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야유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야유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자본이 갈수록 늘어가는 제 삶의 추이와 속도에 정직하게 맞추어져 있다. 부모와 누이들과 형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까스로 마친 작가는 책의 끝 무렵 제 옆얼굴을 그린 페이지 왼편에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나와는 꽤 다른 환경에서 자랄 내 아이’에 대해 적는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근래 보기 드문 민중 출신 작가’가 제공한 ‘모처럼의 민중 구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책은 작가 자신에 대한 야유, 심지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야유를 포함하면서 ‘그들’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인텔리들)’에 관한 책이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의 잃어버린 야유를 복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민중에 대해 ‘우리끼리’ 해치운 개연성 없는 투신과 배신에 대해 정당한 야유를 받은 바 없이 살아왔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욕지기가 날 만큼 졸렬해진 것 역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야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서부터였음을 복원하게 한다. 모든 ‘우리’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모처럼의 구경은 어느새 모처럼의 정화가 될 터이니. (창작과비평)
-김규항